신사엘성형외과의원 | Sinsal Plastic Surgery (Sinsa L) - 눈밑지방재배치·눈밑지방제거·하안검·상안검
구분
눈밑성형
작성일
26-09-27 07:15
조회
1
이름
피민준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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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김제시 농민인 최을호는 30대 중반인 1958년에 반가운 손님을 맞이했다. 한국전쟁 중인 스무 살 무렵에 소식이 끊겼던 작은아버지 최규인이 휴전 15년 만에 그의 집을 찾아왔다. 작은아버지는 인천의 한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고 근황을 소개했다. 작은아버지를 따라간 곳은 인천이 아니었다 1년 뒤, 작은아버지가 다시 찾아왔다. 일자리를 봐뒀으니 함께 가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취업 사기였다. 진실의힘(인권재단)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편찬한 <남영동 대공분실 고문실태 조사연구>는 이렇게 말한다. "6·25 때 헤어진 최을호의 숙부 최규인이 집으로 찾아와 '인천에 일자리를 마련해 놓았니 함께 가자'고 했다. 최을호는 그를 따라 배를 탔는데, 도착하고 보니 인천이 아니라 북한이었다." 최을호는 이북에 20일 정도 있다가 귀환했다. 간첩 교육을 받고 돌아온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수도 있지만, 남한 공안당국은 그것을 입증하지 못했다. 1950년대의 남한은 전 세계에서 반공 질서가 아주 강력한 국가 중 하나였다. 이런 곳에 살았던 사람을 끌고 가서 불과 20일 만에 간첩으로 둔갑시키기는 힘들었다. 간첩 교육에는 적어도 6개월은 소요됐다. 남한 내무부 정보 책임자의 보고서에 기초한 1954년 12월 16일 자 <조선일보> 3면은 "노동당에서는 평북 벽동군 천마산 밑에 소위 노동당 제1학교 및 제2학교를 설치하고 약 3000명을 6개월 내지 일 년간에 (걸쳐) 유격 전술 및 정치 조작 공작을 교육"시킨다고 전했다. 이남 출신이라 남한 언어를 습득하는 데 드는 시간이 적었을 것이므로 교육 기간이 짧았을 수도 있지 않나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하지만 해방 직후와 한국전쟁 중에 남북 간의 인구이동이 대규모로 이뤄졌기 때문에, 1950년대 남한에서 북한 말씨를 쓰는 사람들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 시기 북한의 대남 간첩 교육에서는 남한 언어 교육의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낮았다. 이남 사람을 납치해 간첩으로 만들 경우에는 남한말을 가르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북 출신이 당연히 갖고 있는 사상적 무장이 이남 사람에게는 거의 없었다. 바다이야기고래출현 그래서 이남 출신을 간첩으로 만드는 데도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2004년 12월 21일 자 인터넷판 <시사저널>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중앙정보부(국가안전기획부)의 지시를 받고 북한에 침투해 위장 간첩이 된 공작요원들의 활동을 설명하면서 "평양으로 가서 6개월간 밀봉교육을 받고 돌아왔다"는 어느 요원의 사례를 소개한다. 남한 말씨를 쓰는 사람들에게도 6개월간의 간첩 교육이 필요했던 데서 확인되듯이, 최을호가 그 20일 동안에 간첩 교육을 받고 돌아왔으리라고 보는 것은 무리다. 그런데 최을호의 납북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북한의 무장 공비 파견이 급격히 증가한 1960년대 중반에 북한 무장 요원들이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작은아버지가 썼던 취업 사기 방식을 구사하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협박과 강요의 방식이 동원됐다. ▲  2017년 6월 29일 서울중앙지법 제23형사부는 '김제 가족간첩단 사건'에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이 끝나고 피고인 최을호씨의 아들 최원일씨와 송소연 진실의힘 이사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진실의 힘 최을호가 간첩이 아니었음을 확인해주는 서울중앙지방법원의 재심 무죄판결을 다룬 2017년 6월 29일 자 <경향신문>에 따르면, 무장 요원들은 "월북하지 않으면 일가족을 몰살하겠다"고 협박했다. 1959년에 북한을 다녀오고도 남한 당국에 자진 신고하지 않았으니, 당시의 최을호는 그들을 경찰에 신고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또다시 북한에 가게 됐지만, 이번에도 북한은 그냥 돌려보냈다. 위 진실의힘 재단의 송소연 상임이사는 2017년 7월 10일 자 <오마이뉴스> 기고문에서 "20일 이후 다시 고향집으로 데려다줬다"고 말한다. 1959년과 마찬가지로 1966년에도 이북 당국의 최종 결정권자가 최을호를 살펴본 뒤 그냥 돌려보냈던 것이다. 이번에도 간첩 교육을 시킬 시간은 없었다(관련 기사: 피고인 없는 무죄...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https://omn.kr/npi4). 최을호는 두 번의 경험을 자기만의 비밀로 감춰뒀다. 백경다운로드 위의 <남영동 대공분실>은 "오랫동안 폐병을 앓고 있던 최을호는 북한이 두려워 자수하거나 신고하지를 못했다"고 한 뒤, 그가 마치 스토커를 따돌리듯이 북한을 피해 다녔다고 기술한다. 위 책은 "자신만 함구하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 여기며, 북쪽에서 다시는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도록 김제와 군산 등지를 전전했다"고 알려준다. 그런 뒤, "더 이상 북쪽 사람들이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고 덧붙인다. 그런데 그의 비밀은 그 혼자만 아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아는 사람들은 이북뿐 아니라 이남에도 있었다. 남한 공안당국도 그 뒤 그 사실을 알게 됐다. 43일간 남영동에 갇힌 뒤 사형선고 위 책에 따르면, 그는 1982년 광복절 전날 연행돼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 수감됐다. 중앙정보부가 아닌 내무부 치안본부의 수중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가 두 차례에 걸쳐 북한에 체류한 기간은 40일을 조금 넘는다. 남영동 대공분실도 딱 그만큼만 불법구금했다. 8월 14일 연행된 그는 9월 25일까지 43일간 그곳에 갇혀 불법 구금과 불법 수사를 당했다. 1982년 당시의 형사소송법 제249조는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의 공소시효를 15년으로 규정했다. 그랬기 때문에, 1966년에 북한을 다녀온 것이 사형죄에 해당한다 해도 그 사실만으로는 처벌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공안당국은 전혀 엉뚱한 일들을 간첩행위의 증좌로 조작했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마을에 살면서 보고 들은 것이 북한의 지령을 받아 군사기밀을 탐지하고 수집한 행위로 날조됐다"라며 이렇게 기술한다. "이웃과 함께 배 타고 놀러 가면서 봤던 풍경들, 동네 해안가에 설치된 해안초소들, 예비군 훈련을 받은 일, 경계근무 상황에 대한 것들, 그곳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볼 수 있었던 미군 부대의 모습 등, 그들이 보고 들은 모든 것이 국가기밀을 탐지한 행위로 조작됐다." 터무니없는 불법수사가 진행됐는데도 최을호에게는 엄청난 형벌이 선고됐다. 팀스피리트 한미연합군사훈련에 참여한 양국 전투기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 옆에 최을호 재판 기사를 배치한 1983년 3월 16일자 <경향신문> 11면은 60세 된 최을호가 서울형사지방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소식을 보도했다. 오락실게임 파라다이스 최을호의 항소와 상고는 기각돼 이 판결은 그대로 확정됐다. 사형집행은 1986년 5월 27일에 있었다. 최을호에서 가족 전체로 번진 간첩조작 어이없고 난폭한 국가폭력은 최을호 한 사람의 일로 끝나지 않았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최을호 간첩조작 사건'이란 표현을 쓰지 않고 '김제 가족간첩 조작사건'이라고 표현한다. 최을호의 납북 사실을 활용해 그 본인뿐 아니라 친척들까지 간첩으로 둔갑시키는 일이 자행됐던 것이다. ▲  강요로 작성된 최낙교씨의 진술서. ⓒ 진실의힘 제공 최을호보다 8일 늦게 남영동에 구금된 조카 최낙교에 관해 위 책은 "공소 후 자살"이라고 표기한다. 검찰이 사건을 재판에 넘긴 뒤에 참변이 벌어졌던 것이다. 이 문구 오른쪽에는 "무죄 2017.6.29"이 적혀 있다. 증거도 없이 끌려가 결국 재심에서 무죄를 받을 사람이 공소제기 이후의 검찰 조사 과정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던 것이다. 최을호에 관한 사형선고를 보도한 위 <경향신문> 기사에는 또 다른 조카인 44세의 최낙전이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사실이 기록돼 있다. "최낙전은 9년 감옥살이 끝에 풀려났지만 경찰의 집요한 보안관찰 감시를 견디지 못해 스스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고 <남영동 대공분실>은 말한다. 최을호와 최낙전은 농민이었다. 최낙교는 초등학교 교사였다.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조사받은 최연석(최을호 사촌동생)은 1970년대 후반부터 유행했던 슈퍼마켓의 운영자였다. 우리 주변에서 성실히 살아가던 평범한 시민들이 터무니없는 간첩조작에 휘말려 참혹한 변들을 당했던 것이다. ▲  민주인권기념관으로 사용하는 옛 남영동대공분실. ⓒ 이희훈 2017년 6월 29일의 재심 판결 선고 당시, 김태업 부장판사는 "국가가 범한 과오에 대해 용서를 구한다"라며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이 항소하지 않아 이 판결은 그대로 확정됐다. 국가를 대표해 부장판사가 사죄하기는 했지만, 국가범죄로 인한 피해를 원상복구시키거나 범죄를 저지른 국가 자체를 형사처벌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재심 무죄판결을 토대로 배상을 청구할 수는 있지만, 이 역시 근원적인 대책이 아니다. 국가범죄의 발생 가능성을 낮추기 위해 공안당국의 초기 수사 단계에서부터 민주적 통제를 강화하는 방안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번에도 북한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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