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분 |
눈밑성형 |
작성일 |
26-10-10 10:43 |
조회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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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피민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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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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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그런 공동체의 일원이다. 헌신적인 아내 '에스터'와 다복한 가정을 꾸렸다. 엄격해 보여도 자녀들을 아끼며 성실한 가장으로 가족을 부양하기에 이웃들의 평판도 좋다. 하지만 그에겐 근심이 생겼다. 어느 날부터 이웃 여성 '마리안'과 사랑에 빠진 것. 아내에게 거짓말을 하는 건 신과 양심에 어긋나기에 그는 에스터에게 처음부터 자신의 외도를 털어놓은 상태다.
우리에겐 생소한 메노나이트 공동체의 삶을 엿보다
영화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은 종교 공동체 내부에서 벌어지는 작은 사건을 배경으로 삼는다. 건조한 초원과 듬성듬성한 숲이 끝없이 이어지는 광활한 대지에서 메노나이트 공동체는 노동과 신앙에 의지해 살아간다. 이 공동체의 친척 같은 관계가 바로 중세 문명에 머물러 전기나 기계 사용을 거부하는 '아미시' 교파다. 재침례파(재세례파)의 서로 나뉜 갈래인 셈이다. 이들은 종교적 믿음이 철저히 개인의 자발성에 근거한다고 믿기에 유아 세례를 용인하지 않는다.
급진적 교리해석 때문에 이들은 신·구교 모두에서 박해를 받았다. 재침례파 중 무력투쟁을 마다않던 일파는 봉기를 일으켰다가 학살당했고 평화주의 분파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사제의 권위나 세속 권력의 배후 개입을 배제하는 근본주의 성향은 주류 교파의 공적으로 그들이 찍히는 데 모자람이 없었다. '원수를 사랑하라' 실천하다 보니 잡으러 온 관리를 구조하고 그에게 체포되어 처형당한 사례까지 있을 지경. 그래도 당대 기득권 집단에선 용인하지 않았다.
모진 탄압의 결과는 메노나이트 '디아스포라'라 일컬을 이산으로 연결된다. 동유럽과 아메리카 대륙, 심지어 아프리카까지 이주해 그들만의 공동체를 이루며 전쟁을 거부하는 평화주의, 분파에 따라 차이가 크긴 해도 전반적으로 현대 과학기술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아미시 교파가 그 극단적 사례다. 이들의 원칙적 평화주의는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제공했지만, 폐쇄된 소규모 공동체 특유의 문제를 일으키기도 해 명암이 고루 교차하는 셈이다.
단단한 암석의 작은 틈새에 새싹이 돋아나듯
요한이 사는 마을은 신앙생활은 엄격하지만, 생활에 필요한 기술은 최소한으로 수용하는 삶을 택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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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동을 위한 자동차나 농사를 짓기 위해 필수인 트랙터 사용은 당연하지만, 비누조차 집에서 제작해 개울에서 목욕할 정도로 은근히 보수적인 태도를 견지한다. 대가족은 서로 돌보며 현대 도시의 삶과 동떨어진 그들만의 일상을 영위한다. 마치 시간이 일정하게 멈췄거나 느리게 돌아가는 듯 대대로 물려받은 삶의 태도는 단단한 빙산처럼 변할 기미가 없다.
그런데 하필 이 가족의 버팀목이자 울타리, 기둥인 모범 가장 요한이 조강지처 아내를 두고 다른 여인과 사랑에 빠졌다. 물론 속된 표현처럼 정분이 나 눈이 뒤집힌 그런 지경은 아니다. 문득 시작한 끌림과 상호합의, 서로에게 부족한 것, 결여된 공백을 채우는 애틋함이 요한과 마리안 사이에 감돈다. 작은 동네에서 우리가 이러면 안 된다고 그만 관계를 끊고자 마치 금연 시도하듯 여러 번 노력한 흔적도 관측된다. 하지만 사랑이 어디 논리로 해결될 성격인가.
치정극 설정의 전형처럼 보이지만, 영화 속에서 갈등하는 두 여인이 머리채를 뜯으며 싸움을 벌인다거나,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으로 사건을 대책 없이 폭로하는 경우는 <침묵의 빛>엔 해당 사항이 없다. 너무 솔직하게 털어놔서 그런지 다들 격한 감정을 토한다거나 너 죽고 나 살자 식으로 달려들진 않는다. 그저 슬픈 표정을 내비치고 흐르는 눈물을 묵묵히 견딜 뿐이다. 그렇게 도파민에 절은 요즘 세태와 다른 감정선이 오히려 관객의 진한 몰입을 끌어낸다.
참고 인내하던 감정이 마침내 분출하는 순간
감독은 사실적인 묘사를 위해 전문배우 대신에 실제 메노나이트 공동체 주민 출신 비전문 연기자를 대거 기용하는 도박을 감행했다. 배우의 연기력에 의존하지 않고 온전히 작가가 구상한 세계에서 각자 제 몫을 소화할 수 있도록 배치하는 방법론이다. 정형화한 배우 기용을 과감히 탈피한 덕분에 실제 메노나이트 공동체의 일상을 엿보듯 관객은 그들 고유의 풍속과 문화를 화면을 통해 간접 체험할 수 있다. 말은 쉽지만, 내공이 받쳐줘야 구사할 수 있는 법.
아마 베테랑 연기자가 역을 맡았다면 오히려 어색했을 테다. 비전문 배우들의 '생활 연기'는 고도로 절제된 이야기 속에서 진가를 발휘한다. 영화의 전개는 요즘 흔히 쓰이는 표현대로 'Slow Cinema' 틀에 딱 맞도록 무척 천천히 흘러간다. 그래서 기교로 봉합하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체리마스터
차라리 정공법으로 실제 삶을 고스란히 재연하듯 펼치는 게 최선의 선택이라 판단한 제작진의 결단 덕분에 태평양 건너 한국 관객은 다큐멘터리 관찰하듯 몰입할 수 있다.
현실 메노나이트 공동체 생활도 실제 그렇겠지만, 인물들은 말수도 느린 데다 꼭 필요한 것만 지극히 절제해 구사한다. 대신 한 단어 한 마디마다 꾹 눌러 담듯 묵직하게 힘이 실린다. 사려와 균형감이 돋보이는 수사학이다. 하지만 요한과 에스터, 마리안의 삼각관계가 해소되지 않는 가운데 。。 허물어지는 상황은 이들의 감정이 분출하는 드문 단계에 진입하고 만다. 어떤 상황에도 평형추가 흔들리지 않을 것처럼 보이던 이들이 무너지는 순간은 과연 어떨까?
장엄한 풍경화 속 한낱 인간의 궤적이란
<침묵의 빛>은 제목 그대로 공동체와 이를 둘러싼 대자연의 정적, 그리고 그들만의 세상을 비추는 빛의 이야기다. 장엄하고 거친 자연은 신의 섭리처럼 사람들을 살핀다. 일출과 함께 하루가 시작되고 일몰과 더불어 하루가 저문다. 천재지변이나 부당한 외압만 없다면 이 공동체는 그들의 선조가 그토록 원했던 영속성을 획득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안에는 복잡한 개인사와 충돌하는 감정이 소용돌이친다. 영화는 그 또한 당연한 법칙이자 이치를 조명한다.
이 작품을 글로 온전히 설명하기란 성립 불가능한 명제에 가깝다. <침묵의 빛>은 목격과 체험을 통해서만 올바른 진입로를 찾을 수 있는 비밀의 왕국과도 같은 작업일 수밖에 없다. 애초 감독의 의도가 그에 맞춰져 있다. 신이 6일 만에 세계를 창조할 때 굽어보던 광경이 저런 것일까 상상할 만큼 영화는 도입부터 압도적인 풍광을 보는 이에게 제시한다. 처음엔 저게 무슨 맥락인지 영문을 모르던 관객은 .차 측량하기보단 감각하는 방향으로 선회한다. 그게 맞다.
카메라는 명확한 방향 아래 사람은 작게, 종종 정물화 배경처럼 담는다. 그래서 보고 있자면 일부러 아기자기하게 꾸며낸 것도 아닌데 고도로 양식화된 정물화를 보는 듯하다. 반대로 멕시코 북부의 웅장한 자연은 최대한 압도적으로 규모를 강조하는 스타일로 흐른다. 세 사람이 엉키며 심각하게 고뇌하는 드라마가 분명히 영화의 등뼈이자 허리일 텐데, 화면을 넋을 놓고 보고 있으면 이 모든 게 그저 지구 탄생 이후 수십억 년째 계속되는 순환으로 보이는 기현상.
누가 그들에게 함부로 돌을 던질 수 있으랴
그렇다고 요한-에스터-마리안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든 사단이 그저 보잘것없는 미물들의 찰나에 불과한 걸까? 비록 대자연의 위엄 앞에 개미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들의 인생은 결코 희화화할 성격의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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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알아줄 대단한 업적이나 명성과는 동떨어진 필부에 불과해도 인간이란 존재가 전력으로 고뇌하고 결단함의 무게 역시 가벼울 리 없다. 공동체의 일원으로 감정 표현 마음대로 꺼내기도 쉽지 않던 이들이 마침내 속내를 터뜨릴 때가 도래한다.
카메라는 자식이 일고여덟은 족히 넘는 요한과 에스터의 식사 장면을 담는다. 고도로 조직된 시스템으로 대가족의 끼니는 예식과 같다. 부모는 쉴 틈이 없다. 분주히 손을 놀리며 자식들을 관찰하고 모자란 건 보충한다. 근황도 .검하고 공지사항도 전한다. 배를 채우며 마음의 양식도 소홀할 수 없다. 사제가 없는 공동체에서 기도 역시 가장의 몫. 전쟁 같은 식사가 끝나자 에스터는 잠깐 아이들을 밖으로 내보낸다. 무엇보다 귀한 찰나의 고독을 선물한 것.
순간 요한은 응어리진 것들을 분출하듯 흐느낀다. 체면상 숨기던 감정을 어렵게 끄집어낸 것. 비록 관계의 위기가 왔음에도 오랜 부부의 정은 흔들리지 않는다. 연정을 초월한 우애랄까, 죽마고우가 아니면 감도 잡기 힘든 농밀한 관계 묘사에 경탄이 앞선다. 그러나 각자 노력해도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셋 다 남에게 피해 주지 않으려 고군분투하는 걸 응시하는 관객은 말을 잃어간다.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나면 누구라도 예찬할 극적인 절정이 문득 다가온다.
한낱 인간의 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차가운 운명 앞에서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이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오랜 질문을 <침묵의 빛>은 압도적인 이미지의 파도로 파훼한다. 흑백 무성영화 전성기에 구사하던 이미지의 두께를 21세기에 재현하듯 선보이는 장대비 속 부부의 시간은 그저 멍하니 바라만 보게 될 뿐이다. 편을 나눠 이러쿵저러쿵 논평하기보단 그냥 말없이 바라보게 만들고 뇌리에 새겨지는 그런 장면이 드물게 있지 않은가. 지금이 그 순간이다.
묵묵히 화면을 바라보던 이에게 이 영화는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또 다른 천지창조, 혹은 마법을 하나 더 남겨놓는다. 마술적 사실주의가 바로 이런 걸까 고개를 탁!하고 치게 만들기에 충분한 '기적'의 순간이다. 그 표현 말고 뭐라 할지 모르겠다. 원래 논리와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을 때 경외감은 정적과 함께 다가오는 법. <침묵의 빛>은 그런 초월적인 권능과 만나는 체험이다. 영화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혹은 어디까지 욕망하는가의 한 사례이자 경이로운 작업.
<작품정보>
침묵의 빛
Luz Silenciosa
Silent Light
2007 멕시코 드라마
2026.10.14. 개봉 136분 15세 관람가
감독 카를로스 레이가다스
출연 코르넬리오 월 페르, 미리엄 토우스, 마리아 판크라츠
수입/배급 시네마토그래프
60회 칸영화제 심사위원상
체 특유의 문제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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